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26위 성인 (문단 편집) == [[조선]] 출신 15인의 순교복자 == * 소개된 26위의 성인 순교자 말고, 393위의 순교자가 1867년과 2008년 두 번에 나누어 복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15위의 복자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끌려온 조선 출신 순교자'''들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노예로 5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큐슈로 끌려갔는데, 당시 나가사키 교구장인 세루케이라 주교는 1598년 노예매매에 가담한 신자들에 대한 파문과 전쟁으로 끌려온 노예에 대한 해방을 명시한 사목교서를 발표한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일본인들은 노예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약 7천 명의 조선인이 이로 인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나가사키에는 성 로렌조 성당이라는 조선인 성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393위의 순교복자 중 조선 출신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15위의 순교복자 중에 '''카이요(Caius)'''와 '''빈센트 카운(Vincent Caun)'''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인 첫 번째와 2번째 [[예수회]] [[수도자|수사]]이다.''' 빈센트 카운은 사제 양성을 받다가 순교하였는데, 조선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제서품이 [[1845년]]이므로 그로부터 220여 년 전에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일본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다르게 바꾸자면 [[막부]]가 가톨릭 박해를 하지 않았다면 [[한국 가톨릭]]의 역사도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라고 일컬어지는 '''[[복자]] 카이요'''는 조선에서 [[승려]]로서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쟁포로로 나가사키로 끌려오게 된다. [[1598년]]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자 절에서 생활을 하던 중, [[예수회]] [[신부(성직자)|신부]]의 눈에 띄어 [[세례성사]]를 받았고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어했지만 예수회 입회 허가는 나지 않았다. 대신 [[키리시탄]] [[다이묘]]였던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키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다카야마 우콘]]은 [[필리핀]] [[마닐라]]로 떠났는데, 카이요는 주군을 버리지 않고 [[마닐라]]로 따라가게 된다. [[복자]] [[다카야마 우콘]]이 사망하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온 그는 선교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과 협박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결국 사형집행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회 입회 승인이 났으나 입회 허가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는 이미 순교한 후였다. 결국 생전에 예수회 수사가 되지 못했지만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수도자]]로 인정되었다. 그 와중에 [[도미니코회]] 수사를 숨겨준 죄로 끌려온 일본인 농부 고이치 디에고와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깊은 신앙적 친교를 나누다가 같은 날 화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2016년]]이 되어,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함께 불길에 스러져간 두 사람을 기리는,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 순교 현양비"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 안에 세워졌다. * 2번째 수사였던 '''[[복자]] 빈센트 카운'''의 행적은 [[복자]] 카이요 보다 조금 더 알려져 있다. [[복자]] 빈센트 카운의 원래 성은 권씨로 세례명인 빈센트와 합쳐 빈센트 권이라고 불린다. 그는 원래 양반가문의 자제였는데, 13살에 양친 부모를 여의고 [[임진왜란]]에 휘말려 노예로 [[나가사키]]로 끌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회]] 신부는 그의 총명함을 보고 [[세례]]를 주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시켜 [[사제(성직자)|사제]]로 양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금교령이 선포되고 빈센트 권도 사로 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고, 사형집행 전날에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예수회]] 수사가 될 수 있었다. 복자 빈센트 권은 42살 되던 해에 [[1626년]] 6월 29일에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3층에 가면 다른 복자와는 다른 복장을 한 초상화가 한켠에 있는데, 바로 [[복자]] 빈센트 권의 초상화이다. * 평신도 수도단체인 프란치스코회 재속 3회 출신으로 전해지는 조선인 복자도 있는데,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의 가족이다.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은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렸다가 몇 년 후 다시 [[나가사키]]로 와서 부인인 마리아와 결혼하였고, 아들 키에몬 루카를 낳았다. 츠지 부부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선교에도 열정적이었으나 금교령 선포 이후 잡혀 [[1627년]] 8월 츠지부부는 화형으로, 아들 키에몬 루카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초 츠지 쇼보에 파스칼을 제외하고 부인인 마리아와 키에몬 루카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서 일하던 한국인 수녀가 마리아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밝혀내었고, 이는 나가사키 대교구장과 한일주교교류모임에서 양국 주교들이 인정하여 공식화 되었다. * 이외에 도미니코회 성직자를 숨겨주다가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가 된 다케야 소자부로 코스메 가족, 일본 최초의 신부인 세바스찬 키무라 신부를 숨겨주다가 순교한 하마노마치 안토니오 가족, 프란치스코 재속3회 출신으로 글을 몰랐으나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시네몬 토마, 예수회 신부인 발다살 토마스에게 집을 제공하고 여러 편의를 제공하다가 밀고로 붙잡혀 순교한 아카시지에몬 카요 등의 조선출신 순교복자가 있다. 물론 시복된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조선인들의 한국어 이름이 한문 표기와 일본어의 음독, 훈독과 조선말을 모르는 서양 선교사들의 어설픈 음차 등 여러 단계에 걸쳐 왜곡'''되는 예가 빈번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들 순교자들의 출신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시복 및 시성 이전에 조선인 포로 출신임이 밝혀지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안그래도 마이너리티였던 막부 시절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도 특히 마이너리티였던 조선인 전쟁포로 출신 신자들에 대한 관심도 널리 퍼지지는 않아서, 기껏해야 일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또는 재일동포 출신 성직자, 수도자 및 신학자들이 연구활동 중에 조선인임을 고증할 수 있는 근거를 일본, 필리핀, 유럽을 오가며 박박 긁어모아서야 간신히 한일 교계에서의 공인을 받곤 한다. 그래도 달리 생각한다면 시간이 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진척되고 증거가 모일수록 일본에서 순교한 조선 출신 신자들의 출신이 더 밝혀지리라는 기대는 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